
우리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정원에는 배롱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습니다. 분홍색 꽃을 피우는 나무가 네 그루, 흰색 꽃을 피우는 나무가 한 그루였습니다.
모두 10년 이상 자란 굵은 나무들이라 매끈하면서도 굴곡진 줄기와 제각각의 수형이 제법 멋스러웠습니다. 여름이면 가지 끝마다 꽃이 피어 정원을 환하게 만들어주곤 했는데, 정원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그 중 두 그루는 다른 분께 나눔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는 흰색 한 그루와 분홍색 두 그루, 모두 세 그루의 배롱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세 그루 중 한 그루를 두고 남편과 작은 의견 충돌이 생겼습니다.
배롱나무를 없애고 살구나무를 심자고?
남편은 올해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 배롱나무 한 그루를 정리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곳에서 자라고 있는 살구 나무를 옮겨 심자는 것입니다. 남편의 주장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살구 나무는 올해 초여름 탐스러운 살구를 제법 많이 내어주었습니다. 반면 배롱나무는 예년에 비해 꽃이 눈에 띄게 적었습니다. 게다가 잎과 가지에는 검은 얼룩까지 번져 보기에도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열매까지 주는 살구나무와 꽃마저 시원찮은 배롱나무를 비교한다면 남편의 선택이 훨씬 실용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선뜻 그러자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서쪽 창문의 커튼을 걷으면 늘 그 자리에 이 배롱나무가 서 있습니다. 꽃이 피었을 때뿐만 아니라 잎이 돋고 가지가 자라며 변화하는 과정을 계절에 따라 보여주었고, 아침에 커튼을 걷으며 자연스럽게 눈이 가던 나무였습니다. 그런 나무를 없애자는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서운합니다.
올해 배롱나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실 올해 배롱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잎 표면이 거뭇거뭇해지기 시작하더니 일부는 검은 막을 뒤집어쓴 것처럼 변했습니다. 꽃도 예년처럼 풍성하게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방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싶어 지난 일을 자꾸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배롱나무에는 진딧물이나 깍지벌레 같은 흡즙성 해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해충이 배출하는 감로에 그을음곰팡이가 번식하면 잎과 가지가 검게 보이는 이른바 그을음병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을음곰팡이가 식물 조직을 직접 침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하게 발생하면 잎에 도달하는 빛을 방해해 식물의 생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답니다.
우리 집 배롱나무의 검게 변한 잎도 이러한 증상을 의심해 볼 수 있지만, 섣불리 원인 해충이나 병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이 나무는 그동안 정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자리를 옮겼습니다. 큰 나무를 옮겨 심으면 뿌리가 손상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일조량과 전정, 새가지의 생육 상태 등도 배롱나무의 개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올해 꽃이 적었던 이유를 어느 한 가지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일홍이라는 이름처럼 다시 꽃피기를
남편이 자란 시골 마을 앞길에는 지금도 오래된 배롱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남편은 어릴 적부터 “배롱나무 꽃이 세 번 피었다 지고 나면 가을걷이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실제 농사 속에서 널리 쓰였던 속담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여름부터 가을까지 오랫동안 꽃을 보여주는 배롱나무의 특징과 참 잘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롱나무를 흔히 ‘백일홍나무’ 또는 ‘목백일홍’이라고 부르는 것도 꽃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특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한 송이의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꽃이 차례로 피고 지면서 오랜 기간 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꽃을 보여주던 나무가 올해 유난히 조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아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원의 나무는 꼭 쓸모가 있어야 할까

살구나무는 올해 유난히 예쁘고 달콤한 과실을 주었습니다. 큰아이가 일부러 챙겨가서 먹을 정도로 올 해 살구 열매는 튼실하고 맛있었죠. 그런데 배롱나무는 이런 과실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정원에서 나무 한 그루의 가치를 꼭 열매의 개수나 꽃의 양으로만 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어떤 나무는 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떤 나무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느새 집의 풍경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내게 이 배롱나무가 그런 나무인가 봅니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니 굵은 줄기도 살아 있고 수관도 여전히 풍성합니다. 올해도 많지는 않지만 가지 끝에서 분홍 꽃을 피워냈습니다. 지금의 모습만으로 이 나무가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렵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배롱나무 편입니다!
올겨울과 내년 봄에는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해충이 다시 나타나는지 일찍부터 관찰하고 나무의 새가지가 어떻게 자라는지도 지켜볼 생각입니다.그리고 남편에게 부탁해 봅니다.
“딱 한 해만 더 기다려봅시다.”

내년 늦여름, 서쪽 창문의 커튼을 걷었을 때 이 배롱나무가 다시 가지마다 분홍 꽃을 가득 달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이 온다면 아마 나는 아주 의기양양하게 남편에게 말할 것 같습니다.
“거봐요. 내가 기다려보자고 했잖아요.”